평소 알고 지내던 김범수 선생님(1947.6.14∼2004.4.1)께서 손수 전화를 주셨다. 다름이 아니라 신문에 난 나의 신춘문예 평을 보셨다는 것이다. 아니 떨어진 것을 가지고 창피하게도…. 한번 만나자는 것이었다. 며칠 후 광화문 근처에서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은 17년 연상이셨는데도 늘 나에게 깍듯이 존대하시며 배려해 주셨다. 특히 나지막하고 차분한 목소리의 울림은 마치 덕망 높은 선비풍의 학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신문에 난 신춘문예 평을 보셨는데 그 주제가 선생님 자신이 늘 관심 있게 연구하던 음악과 문학의 연관 관계였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여러 곳에 글을 기고하며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음악 평론가로서의 자질을 평가받고 싶은 요량으로 모 신문사 신춘문예 음악평론 부문에 응모했던 것이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그리고 신문에 기사가 난 것은 왜 당선작이 되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평은 나중에 종합예술학교 총장을 지낸 이강숙 선생님이 쓰셨는데 무척 고무적인 주제와 주장이었는데 결론을 이끄는 설득력이 다소 부족했다는 것이다. 물론 당선작은 없었고 그나마 이런 평이 있었기에 나름대로 쓰라린 고배의 심정에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또 내게 이런 용기를 주시는 말씀과 덕담을 해주시니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선생님께서 원고를 버리지 말고 더 보완하여 완성도 높은 글로 남기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선생님의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도 문학과 음악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늘 약속한 기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글의 완성도를 위해 많은 자료 조사에 힘을 쓰다 보면 늘 시간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이에 선생님은 청탁한 측에 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차후의 청탁을 정중히 거절한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자신을 거만한 필자로 매도한다는 것이다. 사실 원고 청탁을 하는 경우 시일을 촉박하게 주는 일이 다반사다. 결국 자신은 원고도 늦게 쓰고 청탁도 잘 받지 않은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자신의 노력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늘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기 일쑤다. 선생님의 평소의 인품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선생님의 심정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고는 선생님과 커피 향을 뒤로한 채 헤어졌다.
사실 나도 선생님이 무척 어려웠다. 나이도 있고 또 방송 진행을 하시는 유명한 분이셨으니까. 그래서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높은 인품이 늘 가슴속에 동경처럼 남아 있곤 했다. 내가 여러 지면에 즐겨 소개하고 있는 안익태 〈한국 환상곡〉의 드미트리예프 지휘 음반도 사실은 선생님이 진행하는 프로에서 처음 접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방송을 듣고는 겸사겸사 전화를 드리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선생님은 그렇게 올곧게 사셨다. 방송을 천직처럼 여기며 방송국에서는 자료실의 많은 음반들과 늘 함께하셨다.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려면 자료실로 가면 된다고 할 정도로 늘 학구적이셨다.
선생님은 방송을 1982년 ‘명반 비교 감상’을 시작으로 ‘클래식 광장’, ‘음악 살롱’, ‘음악의 산책’, ‘명연주 명음반’, ‘음악의 향기’를 진행했고, 여러 잡지나 음반 내지에 많지는 않지만 예풍이 전해지는 깊이 있는 글을 남기셨다. 특히 부다페스트 4중주단이 연주한 베토벤 후기 현악 4중주 음반 해설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문이다. 나도 이 글에 큰 감화와 영향을 받기도 했고 기고 활동을 하면서 여러 선생님들과 교류를 가졌지만 특히 선생님과의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만남이 늘 인상 깊었다. 무릇 가깝지도 않음은 선생님 특유의 고지식함에서 비롯되기도 했는데 한때는 선생님과 멀어지는 경솔함을 범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분은 세속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분이셨다.
언제인가 비가 부스스 뿌리는 늦은 오후에 내가 일하는 평론가협회 사무실으로 선생님이 찾아오신 적이 있다.
"선생님, 지하철 3번 출구로 나오시면 제가 마중을 나가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는 않는 것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전화를 받아 보니 벌써 나오셨다는 것이다. 언제? 지켜봤는데? 선생님은 검은 색조의 양복에 모자를 깊게 눌러쓰시고 우산까지 들고 내가 한눈팔 적에 출구를 나오셨던 것이다. 나는 선생님께 "선생님! 그렇게 나오셔서 제가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자 선생님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으시며 내게 도넛 꾸러미를 불쑥 건네셨다. 무덤덤하지만 따스함이 은근하게 배어나는 선생님만의 삶의 소통 방식이다. 하지만 내겐 그날 선생님의 잿빛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하게만 보였다.
선생님의 방송은 길게 늘 한결같이 이어졌다. 여느 팝 프로그램 같으면 몇십 주년을 기념한답시고 떠들썩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아니었다 아니 달랐다. 23년째 되시던 2002년 프로 개편으로 가장 좋은 시간대인 2~4시 프로그램인 ‘명연주 명음반’에서 가장 취약한 새벽 1~3시 '음악의 향기’ 프로그램으로 옮기게 아니 좌천된다. 그리고는 이에 모차르트 전곡 감상을 기획하셨고 이어 베토벤 전곡 감상도 시작하셨다. 또 성황리에 개최된 공개 방송 역시 선생님의 위력을 실감하는 기획들이었다. 하지만 이것의 선생님의 명을 재촉하는 일이 될 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2년 뒤 2004년 선생님은 4월의 첫 날 만우절에 방송국 앞마당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언론에서는 급환으로 별세했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잔인한 4월의 미학처럼 자살이었다. 선생님은 23년을 한결같이 방송국으로 출근을 하셨다. 실은 프리랜서이므로 출근은 아니었으나 늘 그러셨다. 검은색 계통의 단정한 싱글 정장에 낡은 가죽 가방을 끼곤 정말 출근 아닌 출근을 하셨다. 그리고는 방송국 윗분들이 아닌 수위나 청소부들과 늘 정겨운 인사를 나누셨다. 방송국 직원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날도 그런 차림에 그 가죽 가방을 메고 출근하셨고 방송 후 방송국에서 제일 전망이 좋다는 남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5층 화장실에서 본인을 내던져 생을 마감하셨던 것이다. 속절없이.
다음 날 나는 선생님 프로그램 담당 피디의 울먹이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생님께서 그만…."
그는 말을 잊지 못했고 급하니 선생님께서 하시던 프로그램을 나더러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진행자가 부음을 맞이했기에 그 사실과 더불어 애도의 뜻이 담긴 멘트를 준비했다. 그리고 추모 특집 방송이 있겠지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이상하게도 자살이라는 것을 숨겼고 추모 방송 같은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오히려 타 방송국에서 선생님을 흠모하던 팝 프로의 진행자가 추모 방송을 내보내게 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렇게 선생님을 쓸쓸히 보냈고 그 마지막 길을 애청자들이 같이했다. 나는 충격에 휩싸여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보지도 못했고 나중에 무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만 했다. 선생님이 맡은 마지막 프로그램을 이어받은 나는 방송국에서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적당한 시기에 그만두었다. 그렇게 인연의 끈을 놓고 싶었고 그렇게 됐다.
또 몇 해가 지나고, 매년 만우절이 되면 추모의 글이 방송국 게시판에 올라오기도 했으나 그마저 끊긴 지도 이미 오래다. 사람은 그것이 없어지면 금방 잊기 마련이니. 그리고 선생님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폐지되어 이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선생님의 흔적은 철저히 그리고 완벽히 삭제되었다. 오래 진행을 한 팝송 프로의 진행자들은 기념물 같은 것을 제작하여 몇 주년 기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선생님도 그런 식으로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상에 올라섰을 때 스스로도 물러설 줄 아는 지혜와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성숙한 배려가 아쉬울 따름이다. 선생님의 인생 여정을 떠올릴 때마다 인생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진행하셨던 '음악의 향기'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은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劫罰)〉 중에 나오는 〈공기 요정의 춤〉이다. 연주는 네빌 매리너인데 글로켄슈필을 첨가하여 다른 연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상함 같은 것이 전해진다. 마치 천국에서 바라보는 미련 가득한 생에 대한 애착이 느껴진다면 너무 자의적인가? 더구나 이 곡의 주제를 가지고 생상은 〈동물의 사육제〉에서 코끼리를 표현하였는데 코끼리는 어찌할 수 없는 커다란 문제를 상징하는 것이라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세태 그래서 삶의 무감각한 일부가 되어 어찌할 도리가 없어져 버린 평범한 악처럼. 그리고 그것을 해결할 길이 극단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이 곡을 들으면 어디선가 선생님의 따스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 글은 2009년에 나온 나의 산문집 『추억 속으로 음악 속으로』 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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