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악 4중주와 더불어 실내악의 대표적 형식인 피아노 3중주의 최고 명작은 뭐니 뭐니 해도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 제7번 <대공(大公)>이라 할 것이다. 제목은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막내동생인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되어 붙여진 것인데 곡의 수준 또한 대공의 지위에 있다 할 것이다.
루돌프 대공은 열여섯 살 때부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웠는데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베토벤과 인간적인 유대를 맺었던 인물이었다. 특히 베토벤에게 연금을 지급하여 창작에 전념하게끔 배려를 해 주기도 했다. 이런 혜택을 누린 베토벤은 루돌프 대공에게 열 곡이 넘은 곡을 헌정하였고 이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역시 대공 3중주였다. 물론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가 있지만. 또한 루돌프 대공은 나중에 사제가 되어 추기경에까지 올랐고 이런 그를 위해 베토벤은 <장엄 미사>를 헌정한 바 있다. 이런 루돌프는 병약해서 마흔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베토벤은 모두 열두 곡의 피아노 3중주를 남겼는데 번호가 붙은 1번에서 7번까지의 일곱 곡과 WoO 39, 39, Op.44, 121a, Hess 48 다섯 곡이 그것이다. 4번 <거리의 노래>, 5번 <유령>, 7번 <대공>의 제목이 붙어 있고 1, 2, 3번의 세 곡은 베토벤이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 번호 1(Op.1)이 된다. 참고로 이런 피아노 3중주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의 편성인데 피아노 3중주라 칭함은 피아노가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대공> 3중주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중심이 되고 첼로가 저음역을 보조하는 이전 시대의 형태가 아닌 세 악기가 대등한 역할을 수행하는 교향악적인 구성을 보여 주는 획기적인 것이다. 더불어 내용적인 면에서도 웅장하고 고귀한 품격을 드러내는 격조의 작품이며 특히 세련된 아름다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악장의 유연한 진행의 세련됨과 당당함이 뛰어나며 특히 3악장 안단테 칸타빌레의 고아한 정감의 노래는 이 곡의 백미라 하겠다. 한마디로 고금은 모든 피아노 3중주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걸작이라 말 그대로 대공에 걸맞은 그런 것이다.
베토벤은 임종 며칠 전 쉰들러에게 유리피데스, 아리스토텔레스, 괴테를 언급하면 이 대공 3중주를 설명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베토벤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생각하면서 곡을 썼던 것이고 루돌프 대공 또한 그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했던 것이다.
곡의 작곡은 1811년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실은 그 이전부터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또한 초연은 1814년 슈판치히의 바이올린, 링케의 첼로 그리고 피아노를 베토벤이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기는 베토벤이 이 이미 청각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례적으로 연주를 맡았던 것이다. 그래서 연주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이 곡에 대한 그의 애착을 엿볼 수 있으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개 연주회로 기록된다.
이런 곡의 연주를 살펴보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보자르 3중주단의 연주가 명성이 높고 보로딘 3중주단의 연주 또한 추천할 만하다. 하지만 왕년의 명연주가로 이루어진 연주 또한 결코 놓칠 수 없다. 코르트, 티보, 카잘스가 바로 그들인데 정말로 환상적인 모임이며 연주 역시 최고의 경지를 보여 준다. 마치 웅장한 실내악단을 방불케 하는 당당함과 격조에 넘치는 품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겠다. 특히 3악장 안단테 칸타빌레의 아련한 선율은 깊은 감동으로 듣는 이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SP 복각의 열악한 음질이지만 이들 뛰어넘는 위대함은 결코 잊을 수 없다.
한편 이들과 견줄 수 있는 소위 "백만 불 트리오" 연주 또한 놓칠 수 없다. 루빈스타인, 하이페츠, 포이어만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연주는 각자의 높은 명성을 떠올리게 되는 탁월한 것이다. 다만 빠른 진행의 템포가 어색하게도 들리지만 그 웅혼한 기품에는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명불허전이라 할 것이다.
이런 두 단체의 연주는 너무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종종 외면당하기도 하지만 소위 오늘날의 명인들인 아쉬케나지, 펄만, 하렐의 연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물론 이들의 연주의 형편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기량이 좋은 정트리오의 연주도 손색없지만 그들의 연주에도 그 어떤 품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곡의 연주에는 인간미 넘치는 품위를 유지해야 되는데 오늘날의 연주가에게는 그런 것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귀족적인 품격과 품위를 전해주는 코르토, 티보, 카잘스 그리고 루빈스타인, 하이페츠, 포이어만의 연주에는 베토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인간의 풍모가 깃들어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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