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이야기

바버 바이올린 협주곡

허당수 2020. 12. 31. 11:16

 현재 우리가 듣고 있는 클래식 음악은 대부분 고전파 시대를 중심으로 바로크나 낭만파가 그 주류를 이룬다. 물론 바로크 이전의 고음악을 즐기는 이들도 있지만 특히 현대 음악을 즐기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아니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 난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들어 보면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선율이 낯설어 호감이 가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곡 중에서는 명곡이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대 작곡가들은 왜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처럼 쓰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쓰지 못하기에 같은 종류의 음악을 거부하고 현대의 더 진보된 음악만을 일부러 고집하는 것일까? 나는 쓰지 않는다가 아니라 쓰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도저히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을 뛰어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예 대중들이 이해 못하는 어려운 음악을 내놓은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와중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현대의 미국 작곡가 있으니 그 이름은 바로 바버(Barber)이다. 비버(Biber), 베버(Weber)가 아니다. 오래 전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에 관한 원고를 기고한 적이 있는데 편집부에서 바버를 베버로 바꾸어 놓았다. 왜냐 바버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오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바보 같이.

 사무엘 버버(Samuel Barber, 1910~1981, 미국)는 말하자면 80년대까지 생존한 현대의 작곡가 아니 현존했던 작곡가다. 바버는 난해 곡을 쓴 것이 아니라 마치 고전으로 회귀하는 듯한 곡상을 구상하였고 그래서 그를 흔히 '우리 시대의 브람스'라고도 칭했다.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있는데 과거의 유명 작곡가들을 능가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버는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물론 그가  완전히 고전파나 낭만파의 서법을 유지한 것은 아니고 현대적인 화성이나 수법을 쓰면서도 결코 서정성을 잃지 않은 놀라움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현을 위한 아다지오>이다. 이 작품은 그의 현악 4중주 2악장을 현을 위한 것으로 편곡한 것인데 그 아름다움과 슬픔의 필치가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그래서 지금은 알비노니 것과 더불의 클래식의 2대 아다지오 명곡으로 자리한다.

 

 한편 그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세 악기를 위한 협주곡도 각각 한 곡씩 작곡한다. 이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명곡을 들라면 역시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쌍벽을 이룬다고 할 정도다.      

 이 곡은 원래 1939년 필라델피아의 사업가인 사무엘 펠츠(Samuel Fles, 1866~1950, Fles-naptha 비누회사)가 자신의 후원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브리셀리(Iso Briselli, 1912~2005)를 위해 바버에게 1000달러를 주고 작곡 의뢰를 한 것이었다. 먼저 두 개의 악장을 받아 본 브리셀리는 매우 만족하였고 나머지 3악장은 자신이 원하는 거장적인 기교를 보여 줄 수 있는 작품이 탄생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브리셀리는 나머지 3악장을 받아 듣고는 거장적인 것이 아니고 또 1, 2악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크게 실망하였고 결국 연주 불가능이라고 단언해 버린다. 이에 그는 작곡료(500달러) 환불을 요구했고 바버는 곡을 작곡하기 위해 스위스 여행을 해 모두 썼기에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버는 브리셀리가 평가한 연주 불가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브리셀리가 졸업한 커티스 음악원 재학생인 허버트 바우멜(Herbert Baumel, 1919~2010)에게 몇 시간 동안 곡을 연습하게 한 후 공개적으로 연주하게 하여 연주 불가능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 사실 중간에 브리셀리의 바이올린 선생이 이 곡이 너의 명성에 누가 되니 바버에게 자신이 고쳐 쓸 수 있도록 종용한 적이 있었다. 이에 브리셀리의 마음이 흔들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바버와 브리셀리는 나중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브리셀리는 1940년 1월 예정대로 이 곡을 초연하지 않고 대신 드보르작의 협주곡을 연주하게 된다. 한편 바버의 협주곡은 1939~40년 초 바우멜이 프리츠 라이너가 지휘하는 커티스 오케스트라와 사적인 초연을 하게 된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1941년 2월 바이올리니스트 알버트 스폴딩(Albert Spalding)이 유진 오먼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정식 초연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 뉴욕의 카네기홀에서도 재연되어 호평을 받게 된다.

 

유진 오먼디 지휘 알버트 스폴딩의 연주 음반(사진은 바버)

 사실 문제의 3악장은 presto in moto perpetuo로 무궁동적인 움직임이 매우 빠르게 전개된다. 물론 기교적으로 어렵지만 거장적인 협주곡의 종악장으로는 썩 어울린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너무 단출한 구성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좀 더 화려하고 기교적인 그리고 웅장한 것이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바버는 당시 아버지가 병환 중이었기에 수정할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자신이 말한대로 1, 2악장과 이질감이 없다고 생각했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보면 아름다운 2악장과 이런 3악장은 다소 엉뚱하기도 하다. 아니면 너무도 아름다운 2악장이었기에 그것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단순한 기교만을 위한 3악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한 가지 사견은 1, 2악장을 완성하고 스위스를 떠나기 전의 상황은 2차 대전 발발 시기였기에 이를 피해 미국으로 귀국하는 그런 긴박함이 전해지기도 한다.

 곡은 1악장부터 매우 낭만적인 것임을 알 수 있고 친숙한 곡상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2악장 안단테가 백미를 이루는데 시작부의 적적함을 달래는 오보 독주가 가슴을 적신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바이올린 독주는 그야말로 가슴을 짖누르는 감성의 향연이 극치를 이룬다. 마치 낙엽이 가득한 만추의 숲 길을 떠올리게 하는 충만한 행복감이 황홀경을 선사한다.

 

 이런 곡의 명연으로는 흔히 아이작 스턴의 바이올린과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를 떠올린다. 두 거장의 여유로움과 관록이 돋보이는 것인데 다소 긴장감을 떨어지지만 거장적인 필치로 깊은 감흥을 전하다. 한편 힐러리 한의 연주는 이런 거장들을 뛰어넘는 신선함이 압도적으로 펼쳐져 놀라움을 전한다. 이런 연주의 반주로는 휴 울프가 지휘하는 세인트 폴 실내악단이다. 다소 지명도가 떨어지는 악단과 지휘자지만 연주는 결코 그렇지 않다. 정말로 놀라운 집중력과 긴장도를 유지하는데 특히 2악장 오보 독주가 압권이며 현악의 연주도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힐러리 한의 질박한 울림 역시 멋진 조화를 이룬다. 듣노라면 전율이 전해지기까지 해 놀라운 명연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현대의 놀라운 협주곡(80년 전 작품이지만)을 대면하게 된다. 추천에 주저함이 결코 있을 수 없다. 들어 보라 그 감성적 선율을!